badbedbooks의 사명을 찾아서

/ 출판 일지




by badbedbooks

badbedbooks.com
2025-12-16




10동안 권의 책을 내다

배드베드북스는 편집자와 디자이너와 시인, 이렇게 셋이 2014년에 만든 출판사다. 10년이 더 됐지만 아직 책은 다섯 권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껏 나온 책도 구성원 중 한 명인 김승일 시인이 일정 기간 쓴 일기, 작업 노트, 시를 모아서 만드는 N월의 책 시리즈 네 권뿐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출간된 유리관 작가의 《사명을 찾아서》는 배드베드북스가 실제로 누군가와 계약하여 만든 첫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 내 소개가 늦었다. 나는 김승일 시인이다. 내 생각에 10년 동안 책을 많이 내지 못한 것은 우리가 바쁘고 게을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은 모든 인간 존재에 내재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의 어리석음, 특히 이 회사의 바지 사장인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배드베드북스의 비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었다. 나는 모양이 이상한 책을 만들고 싶었다. 예컨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책이나 가장 큰 책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의 편집자는 그런 것들이 책이 아니라 굿즈라고 했다. 기록되어 마땅한 정보를 읽기 좋게 담은 책이 아니라, 이미 범람하는 마케팅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그렇다면 굿즈로 소비될 그 무엇도 출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자! 하지만 우리는 가난했고, 책을 팔아 돈도 벌고 싶었다. 우리는 굿즈가 아니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책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정말 많은 책을 상상했다. 그러나 종이책은 굿즈였고, 책은 돈을 담보하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왜 이렇게 어리석었지? 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편집자와 디자이너는 별로 돈, 돈 거리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다들 자기 직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시인인 나만, 시인이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배드베드북스가 책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인 것은 인간이 종종 정신을 차린다는 것이다. 그냥 우리 뭐든 재미로 하자. 돈 버는 방법이 적힌 책은 내지 않겠다는 각오 속에서도, 독립 출판으로 돈을 벌겠다는 어리석음 속에서도 재미는 있었지만……. 제일 재밌는 건 배우는 즐거움인 것 같았다. 그간 나는 돈 벌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얼마나 재밌는 것인지 배웠다.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코미디 소재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재밌다는 사실을 배웠다. 우리는 《사명을 찾아서》를 출판하기로 했다.



배포하고 싶다

<사명을 찾아서>는 문예계 팀 블로그 곡물창고(gokmool.blogspot.com)에서 유리관 작가가 연재한 글을 모은 책이다. 편마다 형식이나 전개 방식이 상이하지만, 전반적으로 유리관이 출판사 이름을 하나 지어내고, 그 가상의 출판사가 어떤 출판사인지 소개하는 내용이 담겼다. 출판사 이름이 ‘관둠’이면, 그 출판사의 구성원은 모두 출판사를 관둔 외주 출판 노동자라는 식이다. ‘관둠’ 출판사에도 외주 출판 노동자에게 연락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 연락책 역시 외주로 구하면 어떨까?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가득 찬 연재였다.

나는 유리관이 상상한 출판사들이 배드베드북스의 10년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치 창출을 위해 무엇이든, 그야말로 실로 무엇이든 해보려고 했던 10년, 부동산에서 집 보여주려고 쓰는 VR촬영 카메라를 사서, 책을 낱장으로 인쇄해 집 안 곳곳에 붙여놓고, 3D 투어 VR책 같은 걸 만들려고 했던(이제 책을 읽지 말고, 시공간으로 체험하세요) 10년. 그러나 정작 카메라가 너무 비싸서, 생각해보니 의미가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10년 말이다. 유리관이 상상한 출판사들과 배드베드북스가 다른 점은 배드베드북스가 가상의 출판사가 아니라 출판 면허와 사업자등록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내가 10년 전에 이 연재를 읽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뭐라도 해보려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 했던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시간 낭비와 실패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글만 읽고 배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내가 《사명을 찾아서》에서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줘야 한다는 사명을 찾았다. 이 연재를 책으로 꼭 만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유리관은 같은 동네에(출판사 사무실이 있는 서울시 마포구 망원) 살면서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친구다. 책을 내기로 결심하자마자 바로 제안했다. 《사명을 찾아서》의 출판 제의를 언제 어디서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쨌든 제안을 하자 유리관이 당황했다. 정확한 단어 선택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나는 괜찮은데, 배드베드북스도 괜찮겠습니까?”

유리관은 유리관이라는 이름으로는 책을 한 권도 낸 적이 없었다. 곡물창고에서 연재할 때에도 조회수가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신 우리를 걱정해줬던 것 같다. 나는 당연히 괜찮다고 했다. 책이 많이 팔릴 것 같아서가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유리관의 글을 널리 배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배드베드북스와 유리관의 첫 기획회의날이 왔다. 나는 편집자와 디자이너와 유리관에게 책을 최대한 싸게 만들고 싶다고 했다. 《세이노의 가르침》처럼 제작비만 회수할 수 있게 책을 배포하면 어떨까? 돈을 벌고 싶어서 이 책을 내는 게 아니다. 어차피 지금 곡물창고 블로그에 가면 글도 다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실로 더 많은 사람이 <사명을 찾아서>를 읽어야 한다. 그러니까 최대한 제작 가격을 낮춰서 책이 거의 공짜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싶다. 내가 또 허황된 소리를 하는데도 우리 친구들은 일단 들어주었다.

옛날 무가지처럼 값싸고 넓은 종이에 삼단으로 인쇄하면 어떨까? 글씨 크기가 작으면 종잇값을 아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블로그에서 《사명을 찾아서》를 읽었을 때의 감동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어. 블로그를 후루룩 읽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차려지곤 했어. 글씨가 작으면 더 집중해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난 학창 시절에 1,000원짜리 영화 잡지에서 인생을 배웠어. 지하철을 타고 통학하며 작은 글씨에 집중하면서 말이야. 《사명을 찾아서》가 전통적인 단행본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공짜 신문처럼 길에서 누가 나눠준 걸 받은 것처럼 느껴졌으면 좋겠어. 아예 다른 책을 사면 끼워주는 공짜 책으로 만들면 어때? 제작비? 모르겠어. 내가 열심히 살아서 다른 곳에서 돈을 벌어올게. 나는 배드베드북스가 책 파는 회사가 아니라 배포하는 회사였으면 좋겠어. 그게 회사일 수는 있나? 공익 회사인 거야! 차라리 광고를 넣을까? 누가 우리에게 광고를 줄까? 가상의 출판사들을 소개하는 글이니까, 가상의 출판사 로고를 하나씩 만드는 건 어때? 출판협회에서 나온 출판사들 소개 책자처럼 만들면 다단으로 디자인해도 괜찮지 않을까?



빠른 반성

《사명을 찾아서》에는 “우리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출판사와 “무엇을 출판하지 않을 것인가” 출판사가 등장한다. 무엇을 출판하지 않을 것인가 출판사는 아무것도 출판하지 않는다. 우리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출판사는 출판사 이름마저도 계속 바뀌는, 대표가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아무도 모르는, 사실상 대표가 유령이 되어 흩어져버린 회사다. 배드베드북스는 이 두 출판사를 닮았고, 그건 정말이지 김승일 시인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것뿐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김승일이 원하는 걸 최대한 들어주고 싶어 한다는 데 있다. 편집자는 김승일 시인의 아내이고, 디자이너는 김승일 시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이다. 이 둘은 대표의 꼬장을 상사의 꼬장이기 때문에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애정을 기반으로 하여 최대한 들어주고 싶어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지만 니가 해보고 싶다니까 일단 해볼게. 둘은 그렇게 말한 뒤에 뭔가를 만들어 온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표가 반성을 빠르게 한다는 데 있다. 다단으로 커다란 종이에 글을 얹고, 제작비를 최소화하여 땅 파서 무료로 배포하겠다는 아이디어는 당연하게도 좌초하고 만다. 다단 디자인은 애초에 문단이 많이 나뉘지 않은 원고를 더 읽기 불편하게 만들었으며, 당연한 얘기지만 종잇값을 아낀다고 제작비가 극적으로 줄어들지도 않는다. 대표의 아이디어는 오히려 책을 지속적으로 배포할 수 없게 한다. 아이고 또 내가 틀렸네. 다시는 이렇게 크게 틀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반성하고 사과하면서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하자는 대로 한다.

《사명을 찾아서》를 《세이노의 가르침》으로 만들고자 한 것부터 완전히 틀렸다. 《사명을 찾아서》는 《사명을 찾아서》니까. 조급해선 안 된다. 게다가 다른 곳에서 돈을 벌어 와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겠다는 생각도 웃긴 생각이다. 어디서 돈을 벌어 오겠는가?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지 마라. 그리고 나는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무언가를 배웠다. 뭘 배웠는지는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쓰겠다.



편집자 노트

편집자는 《사명을 찾아서》를 어떻게 보여주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이 책에 나오는 출판사들은 전부 가상이지만, 어떻게 보면 이미 존재하는 실제 출판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회사를 소개한다는 컨셉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출협에서 나오는 <출판 연감>처럼 만들면 어떨까? 하지만 가짜 출판사들을 진짜인 양 소개한다는 컨셉이 오히려 이 책을 현실의 패러디로만 보이게 하고, 책의 다양한 레이어를 축소시킬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생겼다.

참고가 된 책은 로베르트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었다. 볼라뇨가 지어낸 아메리카의 극우 작가를 소개하는 이 책은, 가상의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음에도 디자인적으로는 일반적인 소설책과 다르지 않다. 볼라뇨는 이 책이 소설이라는 것을 전략적으로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상의 작가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지를 추리하거나, 그 시대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공부하면서 책을 읽게 된다. 《사명을 찾아서》도 굳이 픽션이 아닌 것처럼 굴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우리도 유리관의 텍스트에 깃든 힘을 믿어줄 필요가 있었다. 전통적인 문학 책처럼 편집해야겠다는 확신이 든 것이다.  백과사전 형식 정도는 차용해도 될 것 같았다. 가나다순으로, 본문은 제목 아래 본문선에 맞추는 식으로 편집하면 어떨까? 가독성은 해치지 않으면서 재밌는 구성이 되었다.

작가가 삽입한 괴상한 강조 기호, 텍스트의 운문식 배치등을 없애거나 평범하게 수정하고자 했다가 말았다. 처음엔 강조 기호나 배치가 아무래도 약간 전위적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텍스트를 해독하는 데 불편을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래의 독자가 이런 기호는 왜 넣었지? 왜 갑자기 이런 형식으로 글이 변했지? 추리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고 봤다.



디자이너 노트

뭘 보여줘야 할까. 얼핏 농담처럼 보이는 이 책을 어떤 이미지로 구현해야 할까. 이 책의 표지에는 사실 돼지와 개가 등장할 뻔했다. 《사명을 찾아서》에는 돼지와 개 출판사가 나온다.

“돼지와 개가 서로 앞다리를 맞대고 뒷다리로 일어선 실루엣이 출판사 돼지와 개의 로고다. 당신이 한 마리의 돼지라고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다음엔 한 마리의 개라고 생각해보라. 돼지와 개 출판사는 오로지 그 생각을 향해 돌진한다.”

배드베드북스도 바로 그 생각을 향해 돌진하기로 했다. 돼지와 개 로고를 만들어서 표지에 배치하고자 했다. 하지만 막상 돼지와 개가 표지에 들어가자 적당히 ‘있어’ 보이고 적당히 ‘독특’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디자이너는 돼지와 개가 조금 지겨워졌다. 이 책을 깃발처럼 펄럭이게 만들고 싶었다. 깃발은 구호이고, 거짓이라도 크게 외치면 그것은 하나의 진심이 된다고 믿었다. 대오에 섞여 행진하는 시민1처럼 대충 크게 외치자. 무엇을? 여러 번 판형이 바뀐 본문 pdf를 열고 아무 데나 읽었다. 거리의 현수막과 전단지가 돌려 말하지 않듯, 직설적인 욕망과 조롱이 담긴 하나의 구호.

“그것은 딱 한 권의 책이다. 우리가 맡은 사명은 바로 세상을 바꾸는 한 방, 한 권의 책을 ‘터뜨리는’ 것이다. 딱 한 권이면 족하다는 생각을 품어야 한다. 하나만 터뜨리면 하나만 걸리면 된다. 하나만! 딱 하나! 이 판을 떠도 후회가 없을 정도로!”

이 텍스트는 붉어야 한다. 이것은 딱 한 권의 책이다. 이 책을 16,000원에 팔 것이다. 디자이너는 책등에 책 제목을 빼고 “그것은 딱 한 권의 책이다”라는 문장을 넣고자 했다. 편집자는 반대했지만 김승일 시인이 편을 들어줘서 통과되었다. 인쇄소에서 찍혀 나오는 표지를 보면서 디자이너는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개돼지를 배치했으면 어땠을까. 제목을 좀 점잖게 배치했다면.



교훈

나는 아직도 책을 널리 배포하고 싶다. 하지만 책이 책이 아니게 만들거나 출판사를 출판사가 아니게 만들어서 뭔가를 배포하겠다는 망상은 이제 그만하려고 한다. 대신 책이 처음 나왔을 때만 몇 권 팔리고 끝나게 두고 싶지 않다. 《사명을 찾아서》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사람들에게 써달라고 하고 싶다. 당신이 지어낸 사명은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책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을 계속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는 것으로 유리관의 책에 책임을 다하려고 한다. 그게 다다. 배드베드북스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배포할 것이다.